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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의 고통을 함께 한 삶 - 송학린동문
관리자 2014/10/14

껌팔이에서 기부자로  -  한국역사의 고통을 함께 한 삶

 

미국 뉴욕에서 어려운 이민생활 중에도 고국의 모교에  정성어린 장학금 기부을 하는 동문이 있습니다.  지난 2009년 황산덕 장학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한데 이어  2014년 10월에 다시 2만달러 장학금을 보내는 동문.  기구한 한국역사를 살아낸 한 서울대인의  삶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과  감사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 편집자 주

   

1939년 평양에서 났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1살 저는 피난길에 올라  전라북도 이리(익산)까지 걸었습니다. 그때가 1950년 말,  국토를 종단해 남하한 거죠.  1953년에는 드디어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김포공항을 떠났으니  갈라진  나라의  북쪽에서 11년,  남쪽에서 19년을 지낸 후 나머지 인생은 이곳 미국에서 보낸 셈이죠.  44년이란 긴 세월을….


저는 송학린입니다.

제 경력을 소개하라고 해서 늘어놓자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59년 입학,  63년 졸업, ROTC 1기 소위 임관,  그리고 민통선내  전방 보병 소대장으로 2년간  나라사랑 마쳤습니다. 

그후 국제문화연구소 에서 5년간 근무했고, 70년도에 문교부 유학생 시험거쳐서  F1 (유학생) 비자를 받아 맨주먹에  희망만  주머니에 넣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이번에는 공식적인 것 말고 저의 진짜 경력을  털어 놓겠습니다. 1950년말 전라북도 이리 피난민 수용소에 정착하면서 화려한 경력이 쌓였습니다.  다름아닌 껌팔이, 구두 딱기, 넝마주이,…, 10대 초반의 피난민 소년으로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 가며  몸으로 때웠습니다.  한마디로  양아치 생활을 하면서  거의  3년을 지내다가  한강을 불법 도강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서울에 잠입(?)한거죠. 

서울에서는 껌팔이, 넝마주이  보다 는 품위있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아이스께끼, 붕어빵 장사 등을 전전했습니다.  이렇게  길에서 생존해가며 한영중학교 1년과  용산고등학교 3년을 1958년 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입시 딱 두번만에(재수생으로서) 서울대학교 교복을 입었습니다.

세상이 전부 내것이고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착각 속에  1년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착각도 잠시,   2학년이 되면서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휴학외에는 딴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황산덕교수님 내외분께서 등록금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3,4 학년때는 대여장학금을 알선해 주셨고,  결국 그 은혜로 현재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산덕교수님은 법학개론, 형법, 법철학등을 강의하셨습니다.  그 수업시간들은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끄는 과목들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매주말마다  산행을 하셨는데 빠짐없이 저의 동행을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군복무중이라 주소지가 불확실할 때  대여장학금 회수 문제가 발생하자 그 금액을 모두 대납해 주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빚을 지며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태어난 곳에 돌아가 생을 마감하는 생물들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이토록 크게 진 빚을 잊고 생을 끝낼 수가 있겠습니까? 스승으로부터 받은 큰 은덕을 기리는 것이 제자된 자로서의 도리입니다.

1970년에  태평양을 건너왔습니다.

이곳 미국의 상황도 20년전 전북 이리로 피난간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더군요.  6.25 전쟁당시는 인민의 적, 공산혁명의 반동분자라는 낙인으로  목숨을 건지기 위한 결사적인 이동이었다는  것이 이민과는 다를 뿐이었죠.  이곳에서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학교는 한학기도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피난민과 이민자의 처지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피난내려온  남쪽에서의 정착을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었던 저는  미국에서의 정착을 위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해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자식들에 대한 의무를 마치고 나서야 은사님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만시지탄의 감이 태산같습니다.  은사님께서 가시기 전에 뵙지 못했음이 한으로, 한으로 남습니다.

1년전에 은퇴했습니다.  저는 제대라는 단어를 즐겨씁니다.  인생 제대했습니다. 

지금은 뉴욕시내에 있는 Hunter College Art  Department 에 학생으로 등교하고 있습니다. 인생제대했지만 다시 학생등록했습니다.  때로 동창들이 모이는 컴퓨터 클래스에 참석해  참으로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잊어버리는 나날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희망이 있습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장학금을 받은 수혜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때야말로 황산덕 장학기금의 진정한 발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의 효시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수혜자 선정은 성적기준이 아니라 경제적도움의 필요정도를 우선적으로  참작하기를 요청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모자람을 돕고 채워줌은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보답이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송학린동문은  “황산덕 장학금의 여러 수혜자 학생들로부터 서신을 받곤 합니다만 부담이 갈까 염려스러워 답장을 미루고 있는 중”이라며 말을 맺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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